8
January 11, 2014
행복의 역설
About the Book
Click Image for Check Availability at UW
고통을 껴안아라! 더 큰 삶의 힘을 얻을 수 있다!
≪고민하는 힘≫의 저자 강상중의 두 번째 고민『살아야 하는 이유』. 저자 강상중은 재일 한국인 최초로 도쿄대 정교수가 된 인물로, 일본의 근대화 과정과 전후 일본 사회, 동북아 문제에 대한 비판적이고 날카로운 분석으로 일본 사회에서 유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고민 끝에 얻은 힘은 강하다’라는 메시지를 던져 화제가 된 전작에 이어, 이번 책에서는 우리 시대 삶의 조건과 삶의 의미에 대하여 묻고 고민한다.
자신의 삶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존재에 대해 처절하게 고민했던 아들의 죽음, 그리고 이어 일어난 3ㆍ11 대지진과 원전 사고는 강상중에게 산다는 것의 의미와 살아야 하는 이유를 묻게 했다. 현재를 지배하고 있는 근대 자본주의 아래에서 인간은 고통 받고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는 근대적 삶의 의미를 고민한 일본의 국민작가 소세키와 독일의 사회학자 베버, 심리학자 빅토르 에밀 프랑클, 윌리엄 제임스 등의 치열한 고민과 통찰을 되새기며, 우리시대의 불안과 좌절 속에서 다시금 살아야 하는 의미를 찾아낸다. [교보문고 제공]
Speaker : 강상중
연세대학교 철학과, 문학사
미국 Emory University 신과대학원, 철학적 신학 전공, MA
Emory University 문리대학원 종교학부, 종교철학 전공, Ph.D.
이화여자대학교 강사, 성공회대학교 교수 역임
현재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교수 / 종교철학
강의 노트
행복은 같거나 비슷하지만 불행은 저마다 다르다.(5)
사람의 수만큼 행복을 느끼는 방식이 있어도 좋은데(24), 성장교로 인하여(11) 하나의 가치로 몰리면서 행복론이 뒤틀리게(29) 되었기 때문이다. 불행은 서로 다른데 이래서 꺼내놓고 이야기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우리 삶을 더 어렵게 하는 함정이 있다. 이를 파헤쳐 보자.
지은이의개인적인계기
“내 가족을 덮친 불행은 필설로 다하기 힘들고, 지금도 남을 삼키는 듯한 고통과 슬픔이 치유되지 않았다. 극도의 신경증이라는 병에 시달린 아들 .. 아들은 번민하고 고민을 계속하는 끝에 이 세계를 받아들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들이 거듭나고 ‘회심’을 이루었다고 생각한 바로 그 때, 아들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것, 언제까지고 건강하기를, ‘안녕’이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아들이 죽고 몇 달이 지났을 때 대지진이 일어났고 원전사고라는 미증유의 비참한 사태가 현실이 되었다. … 이런 비참을 겪고도, 그래도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일까?” 이 책이 쓰인 배경에는 이런 슬픈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럼에도 삶에 대해 예라고 말하려네”라는, 절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빅토르 에밀 프랑클의 말을 버팀목 삼아 이 책을 썼다. (한국의 독자들에게, 5-8)
성장제일주의에 매몰된 문명발전론 비판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세계에 대한 신뢰와 인생의 의미가 결정적으로 상처받았다는 점입니다. ..한편으로 공허감, 고독감, 절망감이 만연하는 가운데 여전히 ‘성장교’에 매달리는, 질리지도 않는 사람들의 모습도 눈에 띕니다. …저는 ‘고민하는 인간’의 삶을 살기 시작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나쓰메 소세키의 텍스트에 다시 도전했습니다. 끝까지 고민한 뒤가 아니면 찾아낼 수 없는 소중한 것을, 근대의 본질 요컨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응시한 선인의 말을 통해 저 자신이 움켜쥐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책은 소세키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윌리엄 제임스를 따라 ‘거듭나기’를 권유하는 것입니다.”(10-11)
서장행복론의종언
현대는견고할것처럼보였던근대가녹아내리는시대
지그문트 바우만, ‘고체적인 근대’의 ‘액상화’
현대인들은 일상화된 ‘비상사태’를 살아가고 있다.
현대인들은 인생의 의미를 행복감과 연결지으며 대부분 그 행복감은 돈, 애정 문제, 건강, 노후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즉 적정한 수준의 돈을 벌며 치명적인 병에 걸리지 않고 다투지 않을 정도의 반려자와 함께 노후까지 살면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행복의 조건’이 만들어진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며, 이 조건이 일종의 ‘기준’처럼 자리함으로써 오히려 현대인들은 일종의 올가미에 묶이게 되었다. 조건이 이루기 쉽지 않을뿐더러 저 행복의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는 상대적 박탈감에, 탈락했다는 생각 때문에, 우울증에 시달리기 십상인 것이다. ‘액상화하는 근대’에서 발생하는 몇몇 사건들은 저 행복의 조건이나 그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삶을 내던지는 것이 공허하고 허무함을 일깨운다. 행복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때가 온 것이다.
1. 사람은 왜 살아가는가?
‘고체적인 근대’가 만들어낸 ‘행복 방정식’을 근본부터 다시 생각했던 사상가들 중 대표적인 이들이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이다. 그들은 “비록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의 ‘고체적 근대’를 살았지만,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유동하는’ 근대의 불안이나 갈등, 그 심연을 들여다봄으로써 근대 자체의 임계점”(28-9)을 꿰뚫어 보았다. 소세키 작품에는 자본주의와 관련된 ‘뒤틀린 행복론’에 사로잡힌 이들이 많이 등장하며, 베버는 자본주의적 문화 발전의 끝에는 ‘정신없는 전문인’과 ‘가슴 없는 향락인’이 등장할 꺼라 말한다.
과거에는 신의 신성과 세계의 고통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변신론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 변신론은 크게 누구는 행복의 조건이 주어졌고 누군가에게 조건이 주어지지 않은 것은 신의 뜻에 따른 것이라는 ‘행복의 변신론’과 현세에서의 고난이나 수고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고난의 변신론’으로 나뉜다. 이 두 변신론은 근대를 거치며 ‘행복의 변신론’은 자유경쟁의 규칙을 옹호하며 가진 자들의 기득권을 정당화하는 자본주의의 논리로, ‘고난의 변신론’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대변하는 사회주의의 논리로 대치된다. 하지만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에 따라 오늘날에는 ‘시장경제논리에 근간을 둔 ’행복의 변신론’만이 그 힘을 유지하고 있다.
소세키와 베버는 이 지상에서 특히 근대라는 시대의 세례를 받은 이후에는 이 세계에서 행복을 찾을 수 없다고 확신하며 세속화된 ‘행복의 변신론’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전적이든 근대적이든) ‘고난의 변신론’에게 쉽사리 스스로를 맡기지도 않았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빠져나가게’ 하는 상상력이라는 아편 같은 기능이 현실도피를 조장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오히려 고뇌나 수고에 눈을 돌리고 그 의미에 대해 더욱 깊이 파고들어야 비로소 새로운 행복의 형태가 보일 거라고”(43) 주장한다. ‘행복의 역설’은 여기서 시작된다.
2. 왜 이토록 고독한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왜 고독한가? 이는 근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주체적 인간의 ‘자의식’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자의식은 근현대에 걸친 시대의 명암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예전에 사람들은 신과 연결되어 있었고 신을 전제로 하였으며 그 아래에서 일정한 질서로 형성된 세계의 일원이었습니다. 하지만 근대가 되자 그 연결이 끊어지고 개인은 방면되어 자유로운 의사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종교에서 분리됨으로써…개인이 자신의 생각으로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 그전까지는 질서를 관습적으로 따르기만 하면 좋든 나쁘든 인생을 끝까지 보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근대 이후의 사람들은 나는 어떤 사람인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하는 자아와 관련된 것들을 일일이 스스로 생각하고 의미를 부여해야만 했습니다.(51)
결과적으로 인간의 자의식은 비대해졌고 그만큼 불안감과 소외감 역시 커져갔다. 현대인들은 자유가 삶의 기본원리가 되었기 때문에(50) 개인의 의사에 의해 성립된 사회를 꿈꾸지만 자의식의 과잉으로 인한 긴장과 고독 때문에 “마치 맞선을 보는 젊은 남녀 같은 심정으로 아침부터 밤까지 살아야 하는”(소세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신세라는 것이다. 자유가 불안을 끌고 들어온다는 아이러니인데 이는 사실상 지성의 진보가 인류를 멸망에 이르게 할 것이라는 문명의 아이러니(49)로 이어진다. 더욱이 사고를 많이 하는 지식인일수록 더 쉽게 ‘자의식의 감옥’에 갇혀버리는 희비극(50)도 있다고 직설한다. 그래서 소세키는 ‘아무 것도 느끼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50)고 되뇌인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있었던 빅토르 에밀 프랑크는 비대해진 근대의 인간에 대한 정신의학적 탐구를 통해 우리에게 매우 당황스러운 통찰을 제시한다:
행복한 사랑은 인간과 우주의 심원한 관계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 즉 비극에 휩쓸려 불행한 상태에 있는 사람일수록 우주에 존재하는 깊은 진리를 더 쉽게 엿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59-60)
3. 다섯가지고민거리/ 4. 고민으로둘러싸인시대/ 5. 진짜자기를찾는다는것
현대인들이 고민하는 문제들은 크게 ‘돈’, ‘사랑’,‘가족’, ‘자아의 돌출’, ‘세계에 대한 절망감’등을 들 수 있다. 이는 이 현대의 정치사회구조 및 문화-악마적인 카지노 자본주의, 익명의 군중, 직접 접근형 사회의 도래, 공공 영역의 몰락-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때로는 저 문제들을 벗어나, 저런 행복의 기준들을 거부하며 ‘진짜 자기’를 찾아야한다는 움직임이 일기도 한다. ‘베스트 원’이 아니라도 좋으니 ‘온리 원’이고 싶다는 거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 또한 지극히 근대적인 문제의식이다. 이 ‘진짜 자기를 찾으라’는 욕망은 또 다른 족쇄가 되어 자의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을 강박증으로 몰아넣기 십상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는 그런 상황을 결코 잠자코 지켜보지 않는다. “‘끙끙거림’을 해소하는 치료법을 다룬 책이나 부정적인 사고를 긍정적인 사고로 바꿔 주는 자기계발서 같은 것을 줄줄이 내보내”(93) 강박증을 부추긴다. 물론 자기 찾기는 소중하다. “궁극에 이르기까지 발달한 글로벌 자본주의 안에서 ‘진짜’, 즉 자기다움이라는 유일무이 한 것”이 약해지는 가운데 인간이 모두 “대체 가능하고 교체 가능한 균질한 ‘상품’이 될 것을 요구받고” 있는 가운데 진짜를 찾는 시도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
앞에서도 언급했듯 소세키는 자아, 자각심, 자기의식 등 ‘진짜 자기’를 찾는 일에 집요하리만큼 천착했다. 하지만 그 천착의 과정 끝에서 그가 내놓은 결론은 ‘진짜 자기를 찾으라’가 아니라 ‘자신을 잊어라’였다.
6.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소세키, 베버, 제임스, 빅터 프랑클 등은 혼신의 힘을 다해 정신이 파탄 나기 직전까지 철저하게 생각했다. 이 유별난 정열은 ‘거듭나기’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다. 그들은 근대의 자의식의 심층까지 철저하게 파고들어감으로써 거기서 벗어나 거듭날 수 있었다.
한 번은 정신이나 생명의 위기에 직면했으면서도 기적적으로 부활할 수 있었던 경험이 그들에게 보통 사람과는 다른 세계를 보여 주고 비범한 문명 비판을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123)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이 흘러내리는 근대 안에서 새로이 거듭나는 것이며, 이 상황을 그 거듭남의 계기로 만드는 것이다.
소세키 등이 끝까지 고민한 시대로부터 10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그동안 내내 반성 없는 ‘한번 태어나는 형’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몇 번이고 좌절함녀서도 우리는 한 번도 철저하게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다시 시작하는 것도 생각하지 않고, 멈춰 서는 일조차 없이 그저 ‘실패를 망각하는’방법만으로 오늘날까지 살아온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125)
7.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인생의 의미를 위해 베버는 종교사회학이라는 장대한 학문을 개척했고, 소세키는 다양한 소설을 통해 평범한 일상에서 길어올려질 수 있는 의미의 가능성에 대해 탐구했다. 결국 “인생에서 얼마간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 사람이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을 가질 수 있느냐 없느냐”(134)에 달려있다.
뭔가를 믿는다는 것은 믿는 대상에 자신을 내던지는 일이며 그 대상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것을 할 수 있을 때 자기 안에서 헛돌기만 하던 고리는 끊어지고 의미가 발생한다. 근대 이후 눈에 보이는 물질의 세계만을 취급하는 도구주의적 사고에 의해 인류는 경이로운 번영을 손에 넣었지만 그만큼의 공허와 허무감을 갖게 되었다. 이 와중에 무엇인가를 믿는다는 것은 저 공허와 허무감을 넘어설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해준다. 여전히, 혹은 새삼스럽게 인간에게는 “자신이 귀속하고 기반이 되는 ‘원천’”(142)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원천으로 쉽게 떠오르는 것은 자연, 가정, 지역이나 국가 등의 공공영역이 있지만 저것들 모두 “편안한 마음으로 몸을 맡길 수 없는”(143) 곳이 되어가고 있다. 가족이나 공동체나 국가라는, 사람과 사람을 잇는 모든 것의 실체가 상실될 때 우리의 원천은 다시금 ‘개인’으로 되돌아간다. 이 흩어진 개인이 새로운 차원의 신뢰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개인적 공명’이라고 할 새로운 공통 언어가 필요하다. “서로 공명하고 내던지고 믿을 수 있는 공통항”(146)을 발견해 나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공명은 “진지함”이라는 터전에서 생긴다.
8. 살아갈 근거를 찾아낼 수 있을까?
근대 이전에 인간은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무상한 마음과 인간의 힘은 자연의 힘에 미치지 못한다는 앎을 지니고 있었다. 근대 이후 인간은 이 앎을 잊어버렸거나, 혹은 그 힘을 키워서 저 앎을 지워냈다. 흥미롭게도 오늘날 사람들은 이중의 잘못을 저지른다. 즉 ‘자연은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사회는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은 ‘일회성’과 ‘유일성’ 안에서 살아간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당연한 것이 상당히 오랫동안 망각되어 왔다. 사람을 상품화 하는 시장경제지상주의는 이를 망각하게 하고, 과학기술 역시 ‘죽음’을 지워가는 방식으로만 발달해간다. 저 둘이 맞물려 돌아감으로써 그 안에 속한 이들은 ‘미래’만을 보며 달려 나간다. 한 번 뿐인 인생을 소중히 살기 위해서는 과거를 소중히 해야 한다. 다른 말로는 지금을 소중하며 살아서 좋은 과거를 만드는 것이다.
과거의 축적만이 그 사람의 인생이고, 이에 비해 미래라는 것은 아직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제로 상태입니다. 미래는 어디까지나 아직 없는 것이고 무일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과거는 신도 바꿀 수 없을 만큼 확실한 것이라는 점이다. …과거를 중요시하는 것은 인생을 중요시하는 것일 수밖에 없고, 역으로 ‘가능성’이라든가 ‘꿈’이라는 말만 연발하며 미래만 보려고 하는 것은 인생에 무책임한, 또는 구저 불안을 뒤로 미루기만 할 뿐인 태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168-9)
9. 인생이 던진 물음에 답한다.
빅터 프랑클은 인간이 지닌 가치를 ‘창조’, ‘경험’, ‘태도’에서 찾고 있다. 프랑클은 이 중 ‘태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오늘날 액상화하는 근대사회에서 가장 획득하기 힘든 것 또한 이 ‘태도’다. 이 태도(겸손함과 배려)를 획득하려는 노력은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자 하는 것은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인생에 대해 흔히 ‘이 인생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든가 ‘이 인생에서 나에게 어떤 좋은 일이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고 불만을 토로한다. 그리고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면 절망하고, 최악의 경우에는 자신의 손으로 인생을 끝내려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인생이란 ‘인생 쪽에서 던져오는 다양한 물음’에 대해 ‘내가 하나하나 답해가는 것’이다.
“물음에 ‘대답한다’는 것은 ‘응답하는’것이고, ‘결단하는’것이며 또 ‘책임을 지는’것이기도 합니다. ‘책임’으로 번역되는 ‘reponsibility’라는 영어가 ‘응답’을 의미하는 response에서 파생한 말이라는 것도 ‘대답한다’는 것과 ‘책임을 진다’는 것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인생의 물음 하나하나에 정확히 ‘예’락 대답해가는 것은 …대단히 무거운 결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지요. …자신이 이 세계에 대해 요구해 가는 것이 ‘창조’이고 자신을 넘어선 세계로부터의 요구에 대해 책임을 갖고 답해 가는 것이 ‘태도’…입니다. …세계 안에서 자신에게 요구되는 역할에 대해 하나하나 책임을 갖고 결단해 나가는 것입니다” (186-7)
“우리의 인생은 바로 …인생에서 나오는 물음에 하나하나 응답해 가는 것이고, 행복이라는 것은 그것에 다 답했을 때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복은 인생의 목적이 아니고, 목적으로서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행복은 추구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노력해도 안 된다는 허무주의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좋은 미래를 추구하기보다 좋은 과거를 축적해 가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기가 죽을 필요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도 괜찮다는 것. 지금이 괴로워 견딜 수 없어도, 시시한 인생이라고 생각되어도, 마침내 인생이 끝나는 1초 전까지 좋은 인생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는 것. 특별히 적극적인 일을 할 수 없어도, 특별히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없어도, 지금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충분히 당신답다는 것. 그러니 녹초가 될 때까지 자신을 찾을 필요 같은 건 없다는 것. 그리고 마음이 명령하는 것을 담담하게 쌓아 나가면 나중에 돌아보았을 때는 저절로 충분히 행복한 인생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 등등. …행복의 변신론에 의한 행복 방정식을 바꾸는 것이 불가결합니다. 그렇게 해나가는 과정에서 행복 방정식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자신은 틀렸다고 생각하거나 자시은 비참하다고 생각하는 ‘자기 추방’형 사고에서 조금식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요. 새로 생겨난 사회 안에서 ‘거듭나기’의 인생을 오래오래 즐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Feedback/Errata